티스토리 뷰

2: 앙스타

에이치 01

2018. 5. 30. 22:08

*앙상블 스타즈 에이치 위주 글

*한스타 기준으로 읽어서 캐해석이 다를 수 있습니다. 

*레이에이나 와타에이로 진행될 것 같아요~ 알 수 없음!!



  여느 사람이 그렇듯 후회할 때도 있었다. 무엇을 후회하냐는 말에 콕 집어서 말할 수는 없었지만, 때때로 삶을 후회할 때가 있었다. 특정 시간을 후회하는 게 아니라, 살아왔던 시간 전부에서 삼분의 일 정도에 극심한 회의가 찾아오곤 했다. 기억의 이쪽에서 다시 저쪽으로 후회가 건너뛰는 데에는 규칙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의식이 착지한 곳은 꼭 조금은 축축한 것이다. 그래서 조금은 회의가 찾아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건 어떤 행동의 후회가 아니라, 살아온 자세의 후회였다. 왜 살아있는가에 대한 후회이기도 했고. 


  첫 번째 기억은 진통제를 맞은 기억이었다. 진통제를 만져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언제나 액체의 형태였고, 주사기든 링거액 속에 섞여서든, 그의 몸속으로 들어왔다. 가끔 가습기가 폭폭 내는 소리나 누군가가 틀어놓은 클래식뿐인 특실은 진통제를 맞든 맞지 않든 고요했다. 하지만 진통제가 주는 고요함은 그것과 달랐다. 땅에서 멀어지면서도 세상에 침전하는 느낌이었고 그는 그 느낌을 조금은 사랑했다. 특히 텐쇼인 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약한 몸이 고통에 헐떡일 때에는 그 투명한 약물, 종종 푸른색이던 약물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 그의 삶의 대부분은 그런 시간이었다. 그러니 그가 진통제를 정말로 사랑했다면 그는 그의 삶을 사랑한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는 병약했던 어린 시절을 후회하지 않았다. 해일을 맞고 나서 원망은 해도 후회는 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그때에 무얼 잘못했다고? 아픈 건 나의 잘못이 아니고. 텐쇼인 에이치로 태어난 것도 나의 잘못이 아닌데. 


  두 번째 기억은 그보다 조금 뒤였다. 그날따라 기분이 좋아져 병원 앞을 나갔던 기억이 있었다. 소꿉친구도 만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에이치는 눈을 뜨면 바랐던 것도 바라지 않았던 것도 전부 가지고 있었고, 아프면 울며 떼를 썼고, 진통제와 수면제를 받고는 잠들었다. 그뿐이었다. 


  기억 속에서 처음 잔디를 밟은 날이 그날이었다. 오전에 잠깐 소나기가 지나갔었다더니 잔디 끝에는 작은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고 흙은 촉촉하게 젖어 폭신했다. 코 끝에는 향긋한 나무향기가 감돌고 햇살이 나뭇잎의 초록색을 한층 청량하게 만들었다. 그때 에이치는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전까지 받았던 숱한 선물들 역시 모두 아름다웠으나, 그렇게 고요하고 평화롭게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저 너머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에이치가 아플 때 지르는 비명과 비슷한 톤이었지만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활기차고 즐거운 비명소리는 햇살과 빗방울로 만들어진 찬란함에 퍽 잘 어울렸다. 에이치의 비명소리와는 정반대로 말이다. 갈색 머리의 남자애가 친구에게 소리치면서 무어라 이야기했는데, 에이치는 악당의 이름이나 아이템의 이름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가 외치는 히어로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월요일과 화요일 저녁 5시에 하는 유치한 히어로 만화였다. 사람이 나오니 만화는 아니지만, 에이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러한 종류에는 관심이 없었다. 


  맞고 쓰러져도 다시 부활해서 특훈을 거쳐 악을 무찌른다니. 이쪽은 한 번 쓰러지면 끝이란 말이야. 그렇게 말하자 간병인이 조용히 채널을 틀었다.  


  한 번 쓰러지면 회복되지 않는 건 몸뿐만이 아니었다. 에이치도 그날 처음으로 깨달았지만, 에이치의 정신은 몸보다는 강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의 병약함을 닮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고통 속에서도 무너진 적이 없지만 또래 아이들이 웃으면서 뛰노는 그 장면에 와르르 무너졌다. 갈색 머리 아이는 자신과 같은 병원복을 입고 있었음에도 뛰어놀았고 드러난 오른쪽 팔에는 링거 자국이 없었다. 왼팔에 깁스를 감고 있었지만 그는 아프지도 않은 것처럼 잔디밭을 누비고 다녔다. 


  그 장면을 보고 에이치는 드디어 그의 삶의 숙적을 만났다. 그의 적은, 이후에 만날 조명의 열기도, 동경하고 부러워하는 이상도 아니라 열등감과 회의를 담은 의문이었다. 그는 즐겁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맑게 갠 하늘의 반짝임 따위는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왜 나는 저렇게 살 수 없지? 그 질문 하나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그다음에 어떻게 병실로 돌아왔는지 따위는 기억나지 않는다.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